낚시를 해 본 적은 없지만 낚시꾼들 사이에서 포인트는 무척 중요한 정보인 모양이다. 물고기가 늘 떠돌아 다니는 것도 아니고, 물고기의 습성은 거의 일정하니 어떤 장소에서는 어떻게 물고기를 공략할 것인가 하는 포인트 정보는 소중한 정보일 것임은 충분히 짐작이 간다. 계절에 따라, 수온에 따라, 혹은 어종에 따라 어떤 미끼를 써야 하는지, 어떤 채비를 해야 하는지가 포인트마다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사진을 취미로 하는 분들 중에도 포인트를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분들이 있다. 장전의 이끼 계곡은 언제 가야 하며 어느 위치에서 찍어야 제일 좋은 사진이 나온다 등등. 심지어는 1년 달력에 빼곡하게 그 날의 촬영 포인트를 적어 놓고 GPS 좌표와 시간, 조리개와 셔터 스피드 등 노출 정보까지 정리해 둔 사진가도 본 적이 있다.
그러한 정보를 가지고 최적의 장소에서 최적의 시간에 최적의 노출로 찍은 사진이 최고의 사진일까? 그날의 날씨와는 전혀 상관없이 그 시간, 그 곳에서, 그 노출값으로 찍으면 좋은 사진이 나오는 것일까? 혹여 안개라도 꼈다면? 비라도 내린다면? 구름이 하나도 없다면?
사진이 낚시와 다른 점은 같은 사진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우럭을 낚았으면 우럭을 잡은 것이고 광어를 잡았으면 광어를 잡은 것이다. 크기와 무게로 누가 더 큰 우럭이나 광어를 잡았는지 판가름이 난다. 여러 마리의 우럭 중에 어느 놈이 더 착한지, 어느 놈이 더 예쁜지를 따지는 이는 없다. 다만 언제 어떻게 잡은 놈이 더 맛있는지를 따지기는 하는 모양이지만...
하지만 대관령 같은 장소에서 일 년 중 같은 시간에 찍은 사진이라도 파란 하늘아래 초록이 찬란한 사진과 안개가 자욱한 목장의 서정이 담긴 사진 중에 어느 사진이 더 좋은 사진이라고 골라 낼 수 있을까? 고른다해도 그 사진은 '좋은' 사진이 아니라 '마음에 드는' 사진일 뿐이다. 100마리의 우럭을 놓고 100명의 사람에게 가장 좋은 놈을 고르라고 한다면 분명 두어 마리 이내로 골라질 것이다. 씨알이 굵고 눈동자가 생생한... 등등의 물고기 고르는 요령은 빤하니 말이다. 하지만 100장의 사진을 놓고 100명에게 마음에 드는 사진을 고르라고 할 때 과연 두어 장의 사진으로 추려질 수 있을까?
여러 해 동안 가을이면 단풍을 찍으러 다녔지만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 중의 하나이다. 포인트를 알릴 필요가 있을까? 늦은 가을 단풍나무 아래엔 흔히 낙엽이 쌓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마침 오후 햇살이 낮은 각도로 낙엽을 비추고 있어 반사된 빛 보다는 투과된 빛이 더 많아 낙엽의 붉은 색이 한층 강조되어 있었다. 거의 해를 마주보다 시피 역광인 상태에서 앵글만 낮춰 나무의 그림자만 담아 보았다. 마치 나무를 거꾸로 찍은 것처럼 말이다.
이 사진은 안동의 도산서원에서 11월 중순경 찍은 사진이지만 이 포인트에 다시 간다고 해서 똑같은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 대부분의 멋진, 훌륭한 사진은 그 순간이 사진가의 눈에 들어왔기 때문에 찍힌 것이지, 그 포인트에서 기다리고 있는다고 해서 찍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분 우연히 찍힌 사진이다. 미국 서부 사막 지대를 여행할 때였다. 조수석에 앉아 등받이를 제껴 잠시 눈을 붙이려는데 사이드미러에 햇살이 반사되어 눈으로 들어왔다. 비포장 도로에는 바퀴가 일으키는 흙먼지가 자욱하게 깔리고 있었고. 똑딱이 GR-D를 꺼내 창문을 내리고 파인더도 안 보고 몇 컷을 내리 찍었다. 그 중에 한 컷이다.
미국 서부의 캐년랜드 국립공원이라는 곳에서 석양을 기다리면서 찍었던 컷이다. 하루 종일 국립공원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촬영을 하다 석양이 가장 아름다울 것으로 생각되는 곳에서 한시간 정도를 기다리게 되었다. 일반 관광객이 드나드는 곳에서 500m 정도 풀숲을 헤치고 길도 없는 곳을 찾아 들어갔다. 발 밑으로는 1Km 정도의 낭떠러지. 그 위에서 오후 떨어지는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혼자 기다리는 순간은 정말 황홀했다. 잠시 바위 위에 누워 무료하게 해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찍은 사진이다. 멋진 풍광을 찍은 사진보다 사실 내 발이 찍힌 이 사진이 더 마음에 든다.
결국 저 곳에서 마음에 드는 석양은 찍지 못했다. 해이즈가 너무 심해서 해가 제대로 보이지 않은 채로 날이 저물어 버린 것이다. 나 혼자 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곳이었지만 바로 옆 20여m 떨어진 곳에서 삼각대를 메고 풀숲을 헤치며 나오는 또다른 사진가가 있었다. 역시 나처럼 석양을 기다리던 사진가였다. 주차장까지 길을 찾아 나오면서 잠깐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 곳에서만 한 달 째 야영을 하고 있다고 한다. 멋진 석양을 찍기 위해서다. 그런데 아직까지 못 건졌다고 한다. 일생에 다시 한 번 올까말까 한 곳에서 멋진 사진을 찍어 보겠다고 설치고 다닌 내 모습이 초라해지는 순간이었다.
사진은 순간이다. 그래서 찰라의 예술이라고 한다. 하지만 사진가는 그 순간을 위해 늘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1차로 소주 마시고 2차로 맥주집 가듯 포인트들을 나열하고 한바퀴 순례하는 것이 출사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마음에 드는 사진을 찍을 때까지 한달이고 두달이고 기다릴 생각이 아니라면 포인트를 찾을 것이 아니라 눈과 귀를 열고 그 곳의 피사체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찾아 듣는 편이 낫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을 조심스럽게 카메라에 담아 오는 편이 훨씬 유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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